본문 바로가기
honest

새삼스럽게,

by 파rang 2023. 6. 16.

  머리가 많이 길었다. 초등학교때 이후로 이렇게 길러보기는 처음이다. 중학교때는 두발규정때문에 항상 애매한 중단발을 유지했었고, 고등학교때는 고1 입학하자마자 무슨 패기인지 파격적인 투블럭을 감행했다. 맞다. 당신들이 상상하는 그 투블럭. 덕분에 바리깡 3mm, 5mm, 7mm의 차이를 아주 잘 안다. 다들 내가 투블럭을 했다고 하면 왜 했냐고 묻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당시 내가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가 투블럭을 하고있었고, 여고였기에 딱히 잘 보일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이 아니면 내 인생에 투블럭을 할 날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했다. 한 삼일? 고민한 것 같다. 그때의 내 모습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상상에 맡기겠다. 하하

  또 스무 살 때는 탈색을 해버려서 머리를 더 기를 수가 없었다. 여러 번의 탈색으로 다 상한 머리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또 한 번 엄청 짧게 잘랐다. 그러다 보니 이런 머리 길이가 오랜만이다. 조금은 낯설다. 내가 머리가 길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샤워하고 나온 후다. 지금까지는 머리가 짧아서 젖은 머리로 의자에 앉아도 머리가 등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머리가 등에 닿는다. 덕분에 축축해진 머리가 옷을 젖게 한다. 이런 순간이 너무 오랜만이라 불편하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하고.

  투블럭한 예진, 탈색한 예진, 머리가 많이 긴 예진까지. 다 같은 예진이지만 다 다른 예진이다. 투블럭한 예진이는 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저냥 열심히 공부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귀엽지만 재미없는 친구. 그리고 탈색한 예진이는 사랑받고 싶었다. 정말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사랑받고 싶었다. 분명 사랑받고 있는데, 무언가 다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인지 항상 궁금했다.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데 대체 뭐로 증명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다.

  머리에서 갑자기 왜 이런 얘기가 나오냐고? 이것도 새삼스러워서. 과거의 내가, 예진이가 새삼스럽다. 아 맞다, 그랬던 시간이 있었지…. 싶다. 나는 항상 주목받고 싶고,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했지만. 아니 그런 거에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도 필요한 사람, 없으면 그 빈자리가 큰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내가 원했던 사람이 되어있는 것 같다. 건방진 말일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새삼스럽다. 그때의 나는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올지 몰랐으니까. 알았더라면 좀 덜 힘들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조건 없는 사랑이다. 부모님의 조건 없는 사랑, 친구들의 사랑, 수혁이의 사랑….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 그저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말해주는 당신들. 나는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책에서 그러더라.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를 덮는 사랑이라고. 상처를 채워주는 사랑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거라고. 그러니까 어쩌면, 상처는 사랑을 채울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채울 수 있는 사랑도 많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랑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 상처받았다면, 내일은 그 상처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큰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새삼스러운 날이 올 것이다. 한때는 가장 익숙한 내 모습이었던, 끙끙거리고 있는 내가 새삼스러워지는 날이.




*항상 글 올릴 때마다 잘 읽었다고 말해주는 당신, 어 맞아. 이거 당신한테 하는 말이야. 내 글에서 자기를 발견하면 기쁠 것 같다고 해서 이렇게 스리슬쩍 남겨봐. 당신이 해주는 그 작은 말은 매일 들어도 새삼스럽지 않을 거야. 매번 기쁘고 반가울 거야. 내 글 읽어줘서 고마워:) 항상 행복만 하길 ! 

'hone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은 곧 이야기.  (0) 2023.06.11
덕분에 행복해.  (0) 2023.05.27
사랑이 밥 먹여주냐  (1) 2023.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