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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가끔은 내리고 가끔은 쌓이면서.

by 파rang 2023. 5. 13.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면서 읽고 있는 책도, 글을 쓸 키보드도 들고 오지 않은 나는 오늘 꽤 게으른 하루를 보냈어. 말 그대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간간히 걸려오는 수혁이의 전화를 받고, 저녁에는 잠시 친구도 만났어.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내 하루가 마음에 안 들더라고. 그냥, 그냥 뭔가 텅 빈 기분. 분명 맛있는 밥을 먹고, 좋아하는 친구도 만나서 대화도 나눴는데 집에 돌아오니까 그냥 좀 허전했어. 그럴 때 나는 뭐가 먹고 싶어 져. 마음이 꽉 차지 않으니 배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인 걸까, 작은 재미라도 찾고 싶은 마음인 걸까. 라면을 끓여 먹을까 편의점을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엄마를 불렀어. 엄마는 저녁에 먹은 육개장에 소면을 풀어서 육개장 국수를 만들어 주셨어. 그게 어찌나 맛있는지. 갓김치, 오이소박이, 그냥 김치. 식탁에 김치만 세 종류를 올려두고는 천천히 꼭꼭 씹어서 국수를 먹었어.

 

  국수를 먹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인 *새벽언니의 영상을 뵜어. 이상하게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꼭 새벽언니의 영상을 틀어놓게 돼. 그러면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했어.

 

  나는 살아있지. 살아있으니 이렇게 국수도 먹고, 수혁이와 전화도 하고, 친구와 일상을 나누고, 미래를 걱정하고, 또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음 하루를 시작하고. 그게 참 새삼스러운 거야. 오늘은 유독 수혁이가 보고 싶은 날이었는데 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아직 나에게는 해내야 할 많은 과제와 시험이 남아있고, 사실 산다는 게 매일매일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건가 싶기도 한 하루였거든. 그런데 이게 다 내가 살아있으니 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과제를 귀찮아하는 것도,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모두 내가 오늘도 내일도 살아있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오는 거잖아. 살아있다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엄청 대단한 일이야. 되게 멋있는 일이야.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내일을 두려워하는 것도 내일을 기대하는 것도 모두 살아있어야만 할 수 있어. 살아있다는 건 고통인 동시에 기쁨이야. 나는 너무너무 행복한 순간에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생각했어. 가끔은 행복한 지금 이대로 팍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이만큼의 행복을 누렸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 또 다음에 다가올 슬픔을 느끼기 싫으니까. 살아있으면 반드시 슬프고 힘든 순간이 다가올 걸 알거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밤도 있듯이. 그런데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니? 지금 내 삶에 생이 너무 충만하기에, 내일도 나는 살아있을 거라고 확신하기에 나오는 교만이야. 행복하면 살아야지. 너무너무 행복하면 다음에 올 행복을 기대하며 더 잘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우리는 항상 소중한 건 그걸 잃고 나서야 깨달아. 오늘의 나도 그랬어. 바로 내 앞에 있는 행복은 못 보고 자꾸만 내가 잃어버린 것들, 지나쳐온것들을 생각하며 허전해했어. 배고프다고 하면 뭐든 차려주시는 엄마와 오랜만에 만나서 편하게 일상을 나누고 미래에 대해 얘기할 친구와 항상 나와 함께해 주는 수혁이. 그리고 살아있다는 사실. 나는 오늘도 내가 살아있어서 너무 좋아. 내일도 눈을 뜨고 새로운 하루를 보내고 싶어. 내일의 내가 보낼 하루가, 내가 쓸 글이 궁금해.

 

  밖에서 정겨운 엄마의 웃음소리와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 언젠가는 이것들도 그리워지겠지. 잃기전에 그 소중함을 깨달아서 다행이야. 오늘밤에는 저 소리들을 들으면서 잠을 청해볼게.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유튜버 새벽언니는 2021년 5월, 암 투병 끝에 하늘의 별이 되었답니다. 지금도 보고싶고 그리운 나의 최애 유튜버 새벽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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