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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내 옆

by 파rang 2023. 3. 20.

  그때 기억나? 아마 4월 말쯤이었을 거야. 밤이었고,  날씨는 적당히 선선했어. 조금은 추웠던 것 같기도 해. 날은 저물었고, 버스 막차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헤어지기 싫었던 우리는 교회 앞 계단에서 한참을 떠들었어. 그 교회 앞에는 사람이 잘 지나가지 않는 골목이 있었고, 적당히 우리를 가려주는 나무가 있었어. 사실 나는 알고 있었어.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마지막 버스가 지나가 버렸다는 걸. 하지만 난 그걸 한참 뒤에 너에게 얘기했고,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첫차가 오기 전까지 그 계단에서 새벽을 꼬박 새워야 했어. 그날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그냥 그날 밤공기가 유독 상쾌했고, 계단에 누워서 본 나무는 왠지 투명해 보였고, 한두 명씩 지나다니던 골목에는 마침내 아무도 다니지 않았고. 그냥 세상에 너와 나 둘만 있는 기분이었어. 추웠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고, 나는 그 새벽 내내 어딘가 취해있는 기분이었어.

  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깜빡 졸았던 것도 기억나. 너는 아주 조심스럽게 너의 어깨를 내게 내어주었어. 나는 하나도 조심스럽지 않게 내 몸의 힘을 빼고 점점 너에게 더 많이 기대었지. 사실 나 그때도 완전히 잠들지 않았어. 아니 그 누구보다 정신이 또렷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사랑이 그런 거잖아. 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척하는 거잖아. 사랑 앞에서는 조금은 허술해지고 싶잖아. 사랑 앞에서 허술해진다는 게 난 가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라도 나의 어떤 일부분이 너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완벽하면 네가 나에게로 들어올 틈이 없으니까.

  우리에게는 많은 대학생 연인이 그렇듯이 우리가 함께 쉴 수 있는 집이 없었고, 그렇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우린 찬 바람을 막아 주는 지붕도 없이, 포근한 이불도 없이, 따듯한 장판도 없이 그 딱딱한 돌계단에서 밤을 지새웠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어. 너와 아침이 올 때까지 오랜 시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을 뿐이야.

  우리 앞으로도 많은 밤들을 지새우자. 넌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 내가 네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면 넌 알면서도 모른 척, 씨익 웃어주면 돼. 그럼 난 네 앞에서만큼은 마음껏 약해질게.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척하면서. 네가 나에게 기꺼이 속아줌에 기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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