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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산책.

by 파rang 2023. 9. 11.

  산책하는 걸 좋아해? 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묻고 싶어지는 계절이 왔어. 여름은 강렬한 뜨거움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면 가을은 시원한 바람이 마음에도 여유를 불러주잖아. 바람은 적당히 시원하고, 바람이 불러온 여유는 우리의 발걸음도 느리게 만드는 날씨. 이런 날씨에 산책을 안 나가고 배길 수 있겠어? 날씨가 주는 선물을 즐겨야지. 계절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물이거든.

  나는 주로 저녁에 산책하는 걸 좋아해. 저녁을 먹고 밀려오는 졸음을 뒤로하고, 양말을 신고 밖으로 나서면 나를 맞이하는 시원한 공기. 나가자마자 처음 마시는 그 공기가 너무 상쾌해서 산책하러 나가지 않을 수가 없어. 또 특히 밤은 어두우니 내 모습이 잘 보이지 않잖아? 내가 모자를 썼든, 내 옷이 조금 우스꽝스럽든 내 모습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니까. 어둠 속에서 나는 자유로워지는 거야. 나를 계속계속 내세워야 하는 세상에서 내가 잠시나마 흐릿해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거든.

  귀에는 에어팟을 꼽고 산책하는 동안 들을 노래들을 고심해서 고른 뒤에 첫 곡을 딱 트는 순간, 이제부터 진짜 산책이 시작되는 거야. 노래를 뒤덮을 만큼의 생각이 몰려오는 날도 있고, 노래 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는 날도 있어. 가끔은 평소에 잘 듣지 않는 신나는 힙합 음악이나 댄스곡을 틀어 놓고 내적 댄스를 추기도 해. 나는 춤 실력이 영 꽝이라서 무대에 서는 건 꿈조차 못 꾸거든. 그래도 다들 가끔 상상하지 않아? 많은 사람 앞에서 멋있는 춤을 추고 큰 박수를 받는 내 모습을. 산책하는 동안은 내가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우연히 나가게 된 무대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고, 나는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되는 거지. 이런 상상에 빠져 있으면 괜히 걸음걸이가 당당해져. 갑자기 막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산책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기에도 아주 좋은 시간이지. 아무래도 나는 이 이유로 산책을 좋아하는 듯 해. 너와 함께 이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너도 느꼈을까.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 하루는 평안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명 한명 떠올리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 갑자기 막 연락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 마음이 커지면 냅다 전화부터 걸어보는 거야. 운이 좋으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 우리는 실없는 대화들을 잠시 나누다가 막 웃었다가 하소연도 했다가 결국에는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전화를 끊겠지. 그러면 난 이제서야 조금씩 아파오는 다리를 느낄 거야.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는 건 내가 땅을 딛고 서 있는 감각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때가 왔다는 뜻이지. 나는 이 기분이 좋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을 때,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질 때 산책하러 나가면 알 수 있거든. 나는 걸을 수 있다는걸. 나는 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땅에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산책이 알려줘. 그러고 나면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뒤로하고 일어날 용기가 생겨. 모든 일은 내가 주저앉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되니까. 두려움이 몰려올 때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산책부터 나가는 거야.


  그리고 모든 일에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지. 처음에는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싶다가도 꾸준히, 한발한발 걷다보면 어느새 집이 가까워져 있어. 살다보면 끝이 없는 것 같아 막막하고 힘들때가 많잖아. 그럴때면 산책을 떠올리는 거야. 저 멀리 있는 집을 보는게 아니라 나의 걸음에 집중했던 그 기억, 주변의 나무와 건물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순간에 집중했던 그 기억. 삶이 산책이라고 생각해 보는 거지. 그럼 무거웠던 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거야.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너희들과 함께 산책하러 가고 싶어. 너희들이 다 우리 동네에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에게나 전화 걸어서 저녁 먹고 여기서 만나자고,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우리 산책하러 나가자고 말하고 싶어. 좋은 건 혼자 누려도 좋지만 함께하면 두 배로 좋아지니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도 좋고, 아무 말 없이 걸어도 좋을 거야. 산책하는 동안 너희가 주는 용기와 사랑을 잔뜩 받아 돌아오면 나는 또 새사람이 되어 있겠지. 새사람이 되어 아주아주 깊고 단잠을 잘 수 있겠지.

 

  내일은 우리 같이 산책하러 나가자. 아주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낸 너와도, 힘겨운 하루를 겨우 버텨낸 너와도,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끙끙 앓고 있는 너와도 함께 가고 싶어. 산책하고 돌아오면 우린 그 전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새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