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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여행이 끝나고 난 뒤.

by 파rang 2023. 8. 27.

  샤워를 하고, 스킨로션을 바른 뒤 거울을 본다. 이전의 나보다 조금 더 까매진 내 얼굴을 확인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증거이다. 이번 여름은 그 어떤 여름보다 뜨거웠고, 그 아래의 나도 아주 뜨겁게 돌아다녔다. 거창한 해외여행은 떠나지 못했지만 소소한 여행을 많이 다닌 여름이었다.

  나는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랑' 가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직 인상적일 만큼의 좋은 여행지를 가보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매번 나의 여행 동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알 수도 있다. 이 생각은 어릴 때부터 해오던 생각인데 이번 여름을 지나며 더 확고해졌다.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경주 여행, 수혁이와의 계곡, 대학 동기들과의 광안리, 교회 언니 오빠들과의 수련회, 이 외에도 나를 여행의 순간에 놓이게 해 준 시간들. 쓰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때의 우리가 떠올라서, 열심히 걸어 다니던 다리가, 한대 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웃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던 침묵이 떠올라서 마음이 이내 따듯해진다.

  우리는 언제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국내 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여행을 간다고 하면 누구나 부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왜 언제나 여행을 갈망하는가. 왜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어 하는가. 지치는 일상을 뒤로하고 쉼을 얻기 위해서 일수도 있겠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고, 나에게 좋은 걸 선물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행하는 동안에는 그저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 나의 실수와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과 내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뒤로하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할 때만큼은 오늘의 점심을 무엇을 먹을지,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정도가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된다. 나를 지치게 하는 더위 따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위를 이기고 나를 웃게 하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찡그리다가도 옆에서 같이 찡그리고 있는 친구를 보면 그저 웃기다. 힘들 때는 같이 툴툴거리고,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는 당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옆에서 나와 모든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당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여행은 끝이 있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돌아와야 한다. 즐거웠던 시간을 뒤로하고, 얼굴만 봐도 웃긴 당신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이 참 좋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좋다. 여행은 너무 즐겁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는 모두들 집을 그리워한다. 내 방의 침대가 아주 그리운 순간이 바로 여행에서 돌아오는 순간이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풍경들.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과, 우리 집의 디퓨져 향기, 거실에 놓여있는 아빠의 낚싯대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내 방의 이불. 조금은 달라진 내가 여전한 풍경을 마주하는 그 순간을 나는 참 좋아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여행이 끝난 후에도 당신들의 일상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여행에서처럼 그저 웃을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여행에서 포착한 행복과 기쁨들을 잘 소화해서 일상을 살아낼 힘이 되었기를 바란다. 우리의 삶은 여행이 끝난 후에도 계속됨으로, 어쩌면 진짜 여행은 여행이 끝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기를. 매일 마주하는 눈빛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을 공유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여행이 끝난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여행 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