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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환한 미소로 받는 환영이란.

by 파rang 2023. 9. 10.

  저 멀리서 네가 걸어온다. 언제나처럼 짓궂은 웃음과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우리는 안 본 지 몇 년은 된 친구처럼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냅다 뛰어가 서로를 와락 끌어안고는 "야아아아 보고 싶었어!"라고 외치며 발을 동동 굴리며, 서로를 보고 씩 웃으며 오늘 하루를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하루로 보내자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이 이야기는 나를 가장 환영해 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내가 나의 빛남을 몰랐을 때, 나를 도무지 사랑하지 못해 힘들었을 때 빛나는 눈빛을 하고 한결같이 나를 맞이해 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역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나는 숏컷을 막 벗어난 동글동글한 여자애였고 너는 길고 큰 친구였다. (키도 목소리도 큰 너.... 미안해. 첫인상이 왜 이렇지....?) 우리는 사실 별 접점이 없었는데 어느 날 문득 네가 나에게 놀자고 하는 것이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친구가 먼저 놀자고 하니 그냥 좋다고 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나랑 왜 놀자고 했을까 등등 너를 만나기 직전까지도 걱정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걱정이 무색하게 그 하루를 아주아주 알차게 보냈다. 너는 나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친구처럼 대해주었고, 나도 그 친근함이 좋아 굳이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날 이후 우리는 서로가 없이는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이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왜 같이 놀자고 했어?"
"나는 첫눈에 딱 알아봤지~~~ 우리는 아주 잘 맞을 것 같았어. 그리고 나는 이미 친해진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의 그 감에 뜨거운 감사를 보낸다. 그때 그 감이 아니었다면 나는 네가 주는 환한 환영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 맞다. 너는 나에게 환영받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사람이다. "환영합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해 준 사람. 하루는 장염에 걸려 학교를 늦게 간 적이 있었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너는 나를 보고는 세상에서 제일 환한 미소를 짓더니 "예진아 우리 짝지야!!! 네가 없어서 내가 대신 뽑았는데 이렇게 됐어!!!"라고 말하며 바뀐 우리 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덩달아 얼마나 기뻤는지, 상기된 얼굴로 세상 가장 즐거워하는 너를 보며 나는 꼭 대단한 일을 이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되어 나와 다른 반이 되어 울던 너의 모습, 수능 공부 힘내라며 쇼핑백 한가득 과자를 담아 선물해 주던 너의 모습, 핼러윈 데이 때 초콜릿 봉지 안에 깜짝 편지를 넣어놔 나를 놀라게 하던 너의 모습,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들이 죄다 받은 기억뿐이라 한없이 고마운 동시에 미안해지고 만다. 너는 대체 나의 어떤 면이 좋았던 걸까. 그때의 나는 재미없는 모범생이었던 것 같은데.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 네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기억들로 그 시절을 채웠을까. 너와 관련된 기억들은 너무 소중해서 더 유려하고 와닿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나의 문장력이 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이렇게 고등학교 내내 붙어 다녔던 우리는 스무 살이 되고 나는 서울로, 너는 직장으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했다. 나는 아직도 스무 살 여름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에 찡해진다. 내가 대학생 1학년 처음 방학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때의 너는 더운 여름 장염에 걸려 살이 아주 쏙 빠진 상태였는데 우리는 서로를 보자마자 울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 서러웠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네가 주는 그 익숙함, 오랜만에 느껴보는 환영, 고생한 흔적이 보이는 네 모습이 겹쳐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상 너무 단순한 성격을 가진 너를 걱정했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나보다 더 어른이 되어버렸다. 어른이 된 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너를 존경하는 동시에 조금은 찡한 표정을 짓게 된다. 네가 겪어왔을 시간이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돼서, 그런데도 너는 나에게 항상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그런 너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너에게 때때로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라고. 네가 나에게 준 그 큰 환영이 나를 얼마나 밝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아냐고. 그래서 나는 너에게만큼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내가 받은 환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고 고맙게 다가와서 나는 너에게 무엇이든 주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사람의 끝없는 환영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덕분에 나는 깨달았으니까.

  오랜만에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싶다. 파스타도 치킨도 아닌 밥을 먹고 싶다. 너는 싫어하고 나는 좋아하는 당근을 내가 싹 골라 먹으면서, 너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는 양파와 감자를 발견하면 서로의 앞 접시에 올려주면서. 한 입 먹고는 너무 맛있다며 감탄을 내뱉으며 밥을 먹고 싶다. 그러고 나면 배도 든든해지고 마음도 든든해질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밥이 준 든든함인지 네가 준 든든함인지 모른 채로.

  크고 환한 미소로 세상을 환영하는 네가, 어딜 가든 더 큰 환영을 받기를 바란다. 내가 받았던 그 큰 지지로 이제는 너를 지지하고 싶다. 너의 앞에는 친구와 실컷 떠들고 나면 조금은 나아지는 정도의 아픔만 있기를. 서로의 눈을 보고 펑펑 울고 나면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정도의 슬픔만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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