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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이토록 약한 우리가

by 파rang 2023. 7. 11.

  오늘은 참 이상한 하루다. 일단 잠을 거의 못 잤다. 그 전날에도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평소에는 잘 생각도 안 했을 저녁 9시에 잠에 들었다. 그러고 다시 눈을 뜨자 새벽 1시. 조금 뒤척거리다 보면 다시 잠이 오겠지 생각했는데 그 상태로 해 뜨는 걸 보고, 아빠가 출근하는 것까지 봐버렸다. 겨우 다시 잠들었다가 엄마의 밥 먹으라는 소리에 다시 눈을 뜬 건 11시 30.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전시회도 보러 가고, 출사도 나가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망했음을 직감한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밥을 먹으면서 엄마가 이모와 영상통화 하는 걸 구경한다. 이모는 예전부터 목소리가 컸었는데 여전히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이모부 얘기, 아이들 얘기, 다이어트 얘기 등 자기의 일상을 늘어놓는다. 내용만 들으면 조금은 울적할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모의 너무나도 씩씩한 발성에 이토록 무거운 이야기를 이토록 가볍게 할 수 있음에 놀라기만 한다. 울적해질 틈이 없는 목소리다. 울적한 이야기도 들려주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웃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이모를 통해 깨닫는다. 반면 이야기의 주 청자인 우리 엄마의 표정은 꽤나 진지하다. 이모가 아무리 크고 우렁차게 말해도 이야기의 본질을 잊지 않는다.

"언니 나 자꾸 살이 쪄서 미치겠다. 왜 이래 자꾸 살이 찌지?"
"미경아, 밥만 먹으면 살이 안 찐다. 밥 말고 자꾸 다른 걸 먹어서 그래. 나중에 나이 들고 살찌면 고생한다. 니.."
혹은,
"요즘 은성이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그런데 뭐 자기 입으로 얘기를 통 안 하니까."
"그래 제부 집에 퇴근하고 오면 밥도 좀 신경 써서 차려주고 해라. 원래 바깥일 하는 사람들이 집에서 인정을 해줘야 바깥에서도 인정받는 거야."
  같은 대화들. 이모는 일관되게 우렁차고 엄마는 일관되게 차분하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잘 짜인 콩트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일상이 그 어떤 콩트보다 더 웃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전화를 막 하다가도 은성이에게 전화가 왔다며 전화를 급하게 끊는 이모와 어서 가라며 손을 휘젓는 엄마. 이들의 전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난다. 제대로 된 마무리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는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없이 그냥 그렇게 끝난다. 이들이 전화를 이렇게 급하고 애매하게 끊을 수 있는 건 가족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이런 우렁차고도 차분한 대화를 다시 이어 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의 시작은 내 마음대로 안 되었지만 남은 시간이라도 내 계획대로 살아보리라 다짐하며 옷을 입고,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선다. 일기예보를 확인하자 오늘은 더 이상 비가 안 올 것 같다. 그래도 장마철에는 우산을 챙겨 다녀야 한다는 엄마의 조언을 받아들여 작은 우산 하나를 챙긴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간다. 저 앞에서 사람 한 명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하지만 타인과 시선이 마주친다는 건 굉장히 뻘쭘한 일임으로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고 앞만 보며, 정류장만 보며 걸어간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나를 부르는 것 아닌가. 그것도 굉장히 경쾌한 목소리로. "김예진!!" 깜짝 놀란 나는 앞을 보고, 나를 부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다.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경쾌한 미소를 가진 승연이다. 승연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같은 학교에 다녔다가 내가 전학을 가는 바람에 잠시 멀어졌는데, 또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어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친구다. 나는 반가움과 약간의 뻘쭘함이 섞인 인사를 건넨다. 그간의 안부를 전하고 또 각자의 갈 길을 간다. 정류장에 도착해 잠시 승연이에 대해 생각한다. 승연이는 목소리가 허스키한 친구,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를 아주 크고 경쾌하게 부를 수 있는 용기 있는 친구, 같이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친구다. 인사할 때 자기는 계획이 다 있다고 했는데, 그 계획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조금 더 용기 있는 내가 되었을 때 승연이의 계획을 물으러 가야겠다. 그때는 내가 먼저 크고 기쁘게 인사해야지.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마치 내가 정류장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굵은 빗방울이 내 귀를 때린다. 후두두두두두두둑. 전시회장은 여기서 약 한 시간 거리인 해운대에 있고, 가다가 중간에 환승도 한 번 해야 하고, 좀 걸어야 하고, 그 와중에 사진 찍겠다고 들고 온 카메라까지. 잠시의 고민 끝에 결국 목적지를 바꾼다. 근처 카페로. 가려고 했던 전시의 이름이 <슬픈 나의 젊은 날>이다. 오늘 하루를 두고 만든 전시일까. 내가 하려고 했던 모든 게 꼬여버린 슬픈 나의 젊은 날.

  카페에 앉아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생각한다. 날씨 때문에, 전날의 누적된 피로 때문에, 어깨 위의 짐들 때문에 우리는 종종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계획은 틀어지고 바뀌기 일쑤이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약한 존재 아닌가. 약하니까 혼자서는 해결 못 할 고민을 나누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다 친구까지 피해버리기도 하고 고작 비하나에 목적지를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원래 약하니까 너 왜 그렇게 약하냐고 물러터졌냐고 너무 다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약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참 대견하지 않은가. 약한 우리가 어떻게든 사랑하려 하고, 일어나려 하고, 살아가려 한다는 게. 이토록 약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건 이모의 우렁찬 목소리, 승연이의 경쾌한 인사 같은 것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한 우리를 응원하는 또 다른 약한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사도 응원도 위로도 다 약하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토록 약한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있다. 내일도 난 약할 테지만, 약하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겠지. 약한 나를 싫어하기도, 사랑하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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