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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끝내주는 인생.

by 파rang 2023. 7. 23.

  한 달 내내 기다렸던 날이 바로 오늘이야. 덩치는 큰데 웃긴 애가 오는 날. 큰 만큼 큰 마음을 가진 애를 만나러 가는 날. 나는 뭐든 극적인 게 좋아. 특히 오랜만의 만남은 더욱더. 그래서 약속 시간보다 미리 가서 기다렸지. 들뜨는 마음을 붙잡을 수가 없어서, 마음을 먼저 보낼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더위를 감수하고 일찍 나섰어.

  너무너무 간절했던 게 손에 들어오면 무감각해지는 기분을 알아? 나는 그래. 내가 너무 원했던 것, 너무나 기다렸던 날이 다가오면 현실감각이 없어져. 그렇게나 기다렸던 날이 오늘이란 게 믿기지 않고, 몇 달 며칠도 아닌 몇 시간 뒤면 네가 나온다는 사실이 기쁘고도 떨려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나는 꿈에만 젖어 사는 사람인데 꿈이 바로 내 앞에 있다니. 안 그래도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현실이 더 멀어져. 아무렴 어때. 지금은 이 꿈이 현실인데. 지금 내 현실은 너랑 놀고먹는 것. 같이 손을 잡고, 걷고,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 내가 유일하게 현실에만 집중하는 순간은 너를 만나는 바로 그 첫 순간이야. 너와 함께하면서도 또 네가 떠나야 한다는 걸 걱정하는 미련스러운 나이기에 나는 그 첫 순간이 제일 좋아.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롯이 현재만 있으니까. 과거의 실수도 미래의 걱정도 멈출 수 있으니까.

  이날만 기다리는 내가 참 웃기고 가끔은 슬프지만, 이날이 너무 끝내주게 행복할 걸 알아서 어쩔 수가 없어. 모든 게 불확실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하리라는 것. 많이 웃을 거라는 것. 불확실한 세상에 확신을 주는 게 있다니.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너는 알까. 내가 네 품이 정말 많이 그리웠다는 걸. 그저 두렵고 무서운 게 많은 나는 그저 쉽고 단순한 네가 필요했어.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그냥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는 네가 너무 그리웠어. 너는 내가 없어도 나를 느끼지만 나는 아직 작은 사람이라 그게 어렵거든. 내 옆에서 웃고, 말하고, 내가 직접 만질 수 있는 네가 그리웠어. 누워서는 잠든 너의 등을 바라봐. 어쩜 저렇게 큰지. 같은 사람인데 나보다 모든 게 큰 네가 신기해. 이토록 큰 네가 이만큼 작은 나를 사랑하는 게 신기해져. 우린 참 다른데, 성격부터 취향까지 어쩌면 같은 것보다 다른 게 많은 우리인데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까?

  너의 등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잠겼다가, 혼자서 너를 생각했던 밤을 떠올려. 네가 옆에 없어서 더 간절했던 밤들. 닿을 듯 닿지 않아서 더 애틋했던 밤들. 요즘은 카톡 하나면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연결될 수 있잖아. 나는 이 세상 누구와도 연결할 수 있는데 유일하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와 연결될 수 없어서 속상했던 밤을 떠올려. 바로 내 앞에 있는 네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야.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그립다니.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야. 내 앞에 있는 네가 신기하고도 기뻐서 더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보면 네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릴 거고, 그럼 나는 더 운이 좋은 사람이 되어 너의 얼굴을 볼 수 있겠지.

  하루는 송사리를 잡으러 갔어. 날은 푹푹 찌고, 나는 이미 더워서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계곡이고 뭐고 그냥 에어컨이 나오는 방에 누워있고 싶었어. 하지만 꼭 송사리를 잡아야 한다며 추억을 쌓아야 한다고 말하는 너를 따라 계곡에 갔지. 나는 너의 손을 잡고, 너보다 더 큰 네 형은 매일 투닥거리지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 연인의 손을 잡고 조금은 험한 길을 내려가. 험한 길을 혼자가 아니라 같이 내려갈 사람이 있다는 게 참 기뻤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가끔은 투정도 부리면서 그렇게 끝끝내 도착한 계곡은 깜짝 놀랄 만큼 시원했어. 우리 네 명은 한참을 계곡 바닥의 송사리를 잡느라 바빴지. 누군가 송사리를 한 번에 많이 잡으면 우르르 몰려가 구경하고, 가져온 페트병에 송사리를 아주 소중하게 옮겨 담아. 송사리에만 집중하다 눈을 들어 본 풍경은 온 사방이 초록이었어. 그런 초록을 본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올라오는 행복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봐. 그러다 문득 생각해. 이런 게 끝내주는 인생이 아닐까 하고. 슬아 작가님의 책을 읽은 후로 줄곧 생각했거든. 끝내주는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작가가 되면 끝내주는 인생일까, 내가 바라고 원했던 것들을 이루면 그게 끝내주는 걸까. 그런데 끝내주는 인생이 계곡에 있다는 걸 누가 알았겠어? 내 발을 지나가는 물은 시원하고 다정한 연인이 있고 초록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그 무엇보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있는 곳. 그 마음이 있는 곳이 끝내주는 곳이었어. 어디든 누구든 서로를 아끼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끝내주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거야. 그 마음에 기대기도 하고 마음을 내어주기도 하면서.

  나는 오래도록 이날을 못 잊을 거야. 끝내주는 인생을 읽을 때마다 이날을 떠올릴 거야. 끝내주는 인생을 쉴 틈 없이 살아가면서, 때론 기다리기도 하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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