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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한 겨울의 도서부.

by 파rang 2022. 11. 3.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기 위해 가방을 챙기다가 문득 책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도서관 소유라는 걸 알 수 있는 라벨지, 그 위에 한 겹 더 붙어있는 네모난 테이프, 책장을 넘기면 꽝하고 찍혀있는 도장까지. 도서관의 흔적이 듬뿍 담겨있는 책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고등학교 도서부가 떠올랐다. 

나는 고등학교때 3년 내내 도서부였다. 그것도 꽤나 열정적인 도서부원. 신간이 들어오면 새책 냄새가 나는 책 몇십 권을 책상 가득 쌓아놓고 도서부 친구들과 함께 수녀님의 지시를 따라(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천주교 재단의 학교였는데 당시 도서부 담당 선생님이 수녀님이셨다. 내가 생각했던 수녀님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던... 따뜻하지만 강단 있으신 우리 수녀님...ㅎㅎ) 도장을 찍고, 테이프를 붙이며 우리 도서관의 책이 될 준비를 했다. 그 작업이 나는 참 좋았다. 도서관의 신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도서관 한가득 풍기는 새책 냄새도 좋았다. 또 무엇보다 내가 우리 학교 도서관을 관리하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이 당시의 나에게는 큰 자부심이었다. 동그란 책상 두 개에 도서부 친구들이 모여서 웃고 떠들며 새 책에 '데레사여자고등학교'가 쓰인 빨간 도장을 꾹꾹 찍는 모습. 갑자기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도서관에 대한 애정이 떠올랐다.

내가 문헌정보학과에 온것도 다 고등학교 도서부 활동 때문이다. 도서부를 하면서 학교 도서관을 내가 관리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서 친구들에게 책을 찾아주고, 책을 반납, 대출하고, 나를 보러 도서관에 찾아온 친구들과 반갑게 눈인사를 나누고. 다른 친구들이 못하는 일을 내가 해줬을 때 느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쓰고 보니 자소서에 쓸법한 뻔한 얘기 같지만 나는 정말 그랬다. 그래서 수녀님이 수업시간 도중에도 도서부 일 때문에 나를 부르거나, 고3이 돼서도 도서 부일을 가끔씩 맡기시는 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학교 시험기간이 되면 항상 북적북적하던 도서관도 조용해진다. 많아도 사람 한두명 정도? 나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그것만큼 행복한 게 없다. 30분 남짓하는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다가 종이 울리면 그 책을 빌려서 다시 교실로 향한다. 빌린 책을 책상 서랍 밑에 넣어두면 그냥 그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바빴던 고등학교 시절에 책을 가장 좋아하고, 즐겁게 읽었던것 같다. 특히 시험기간에는 읽고 싶은 책이 왜 이리 많은지... 3년 내내 학교 도서관을 기웃거리다 보니 졸업할 때쯤 되어서는 대충 도서관에 꽂혀있는 책의 위치를 외울 정도였다. 물론 우리 학교 도서관이 많이 작기도 했지만 말이다. 

크고 멋있는 다른 도서관들에 비하면 우리학교 도서관은 솔직히 도서관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정말 작고 협소한 도서관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책을 읽기 좋았다. 나는 항상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가 다른 큰 도서관에 가서 책을 구경하자니 너무 많고 다양해서 어지럽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이나 청소시간에 학교 도서관에가서 신간 코너나 800번대를 기웃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뽑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읽었던 기억, 도서관에 수녀님이 항상 사두시는 사탕을 몰래몰래 빼먹었던 기억, 도서관 소파에 누워서 친구들과 장난치던 기억, 수녀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던 기억...... 대학에 오고 정말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기억들이 오늘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때는 그게 내 일상이었는데. 지금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라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 참 도서관을 좋아했었다. 새 책이 주는 반들거림도, 헌 책이 지니고 있는 손때도, 그리고 그냥 도서관에 가면 느껴지는 편안함도. 그래서 책과 함께 일하고 싶었고, 내가 느끼는 편안함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했다. 그래서 문헌정보학과를 온건데. 지금의 나는 잘하고 있나? 잘 모르겠다. 

언제까지 고등학교 도서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 또 새로운 나의 도서관을 찾아야겠다. 내가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그런 도서관을. 

갑자기 수녀님이 보고싶다. 내일은 용기 내서 연락 한번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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