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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우리네 회색빛 인생에는 봄바람이 무슨 상관있을까

by 파rang 2023. 4. 21.

  요즘 너랑 전화할 때마다 자주 하는 대화가 있어. '나중에, 다음에'에 관한 이야기. 지금 당장은 우리가 마주 볼 수 없으니, 너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장난치며 깔깔거릴 수 없으니 우린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눠. 가깝게는 올해 6월에 휴가 나오면 뭐 할까부터 멀게는 제대하고 나서의 이야기까지.

  나는 불확실한 게 싫어.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도 싫고, 내가 기울이는 노력이 의미 있는 노력인지 재보는 것도 싫어. 불확실이 주는 불안과 조급함이 싫어.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불확실한 삶을 확실하게 만들고 싶어서일지도 몰라.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확신이 흐릿해져 갈 때쯤 다시 찾아 읽어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너는 항상 확신에 차 있어. 우리는 반드시 행복할 거라는 확신,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우리는 함께 일 거라는 확신. 우리 사이의 작은 소음이 생길 때도 소음은 소음일 뿐 절대 우리를 멀어지게 할 리가 없다는 확신. 생각해 보면 너는 늘 그랬어. 우리가 100일을 함께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특히 남녀 사이는 더더욱 그런데, 우린 자연스럽게 그때를 계획했어. 멋있고 예쁜 곳을 찾아보고, 너는 나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아직 많이 남은 그날을 상상하며 일정을 미리 비워두기도 했어.

  오늘 전화하면서 네가 그랬잖아. 운전병으로 1년 6개월 지내고 나면 운전의 달인이 되어있을 거라고. 그러면 제대하고서는 렌터카 빌려서 여기저기 놀러 다니자고. 우리가 언젠가 서울에 취업하게 되면 서울에서는 차가 많이 필요 없을 테니 차는 돈을 어느 정도 모으고 나서 장만하자고. 나는 그저 웃으며 그러자고, 너무 좋다고 대답했어. 전화를 끊고 나서는 그 말이 내내 생각났어. 사실 너무 먼 이야기잖아. 너의 제대도, 우리의 취업도. 그런데 그토록 자세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네가, 너의 미래에 당연한 듯이 함께하는 내가 참 든든하게 느껴졌어. 나는 불확실도 싫지만 막연한 확실도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 뒤에 내가 받을 상처가 무서워서 웅크리는 사람인데 너를 만나고 난 이후로는 네가 하는 모든 확신이 좋아. 그 확신이 힘이 되고, 오늘을 살아가게 해.

  이제는 네가 하는 확신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하지 않아. 인생이란 게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하잖아.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미래라면 나는 너의 그 확신에, 우리가 함께 렌터카를 빌려서 여행을 가는 미래에 한 표 던질래.
 
  나의 글에 네가 언제까지나 등장하기를 바래. 그렇게 막연한 미래가 확실한 현재가 되기를 바래. 내일은 주말이고, 주말에는 너와 대화를 좀 더 오래 나눌 수 있어. 이건 확실한 사실이야.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서 한 치 정도는 알게 해 줘서 고마워. 내일도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대화들을 나누자. 그렇게 오래오래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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