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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봄이야.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차지 않고, 오래 걸어도 몸이 떨리지 않는 봄이야. 봄에는 벚꽃이 펴. 이번 봄에는 벚꽃을 자주 볼 수 있었어. 가는 곳마다 눈드는 곳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거든. 그런데 벚꽃은 너무 짧아. 1년을 기다린 벚꽃인데 기다림이 무색하게 아주 잠시 피었다가 이내 저버려. 안 그래도 짧은데 그사이에 비라도 오면 버티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져 버려. 왜 예쁜 건 늘 짧을까. 눈도 그렇잖아. 막 내려서 하얗고 예쁘게 쌓인 눈을 볼 수 있는 건 잠시뿐이잖아. 조금만 따뜻해져도 녹아버리잖아. 난 예쁜 사랑이 하고 싶은데, 예쁜 것들이 좋은데 예쁜 게 잠시뿐이라면 또 예쁜 게 마냥 좋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예쁜 건 좋지만 짧은 건 싫으니까. 나는 뭐든 오래오래가 좋으니까... 2023. 4. 3.
해피 아워 해피 아워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독감을 다시 끙끙 앓으며 나는 기억해내. 돈이 없어서, 혹은 돈도 시간도 있는데 마음이 없어서, 혹은 마음이 있긴 있는데 엇갈려서, 우리는 행복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에 자주 실패해. 내 맘이 당신 맘과 다르고, 자꾸 눈을 피하고, 우린 서로 모르고, 그게제일 그렇지 뭐, 그 밖에 수많은 이유들로 쉽게 언해피 아워를 보내. 행복이라는 희귀한 순간이 얼마나 우리 손에 잘 안 붙잡히는지 붙잡았다가도 어느새 달아나 있고 의도치 않은 순간에 습격해서 놀래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해피같은 말에 딱히 집중하지 않게된 지 오래야. 이제는 그저 아워를 생각해. 섣부른 기대와 실망 없이 의젓하게 시간을 맞이하고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평생 못 될 것 같지만 말이야... 2023. 3. 27.
침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건 아주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 것만큼, 밥 먹고 바로 침대 위로 올라가서 뒹굴뒹굴하는 것만큼,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이불속에 폭-하고 들어가 흐뭇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이야기야. 나는 침대 위에서 너와 나누는 눈빛이 좋아. 침대 위에서 네가 나를 아주 세게 꽉- 끌어안아 주는 게 좋아. 내가 끝도 없이 너에게 파고드는 게 좋아. 네가 나를 아주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팔을 활짝 벌리는 게 좋아. 내가 네 냄새를 킁킁대며 맡을 때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만히 있는 너의 그 표정이 좋아. 침대는 참 신기해. 침대 위에서는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 기분이야. 내 모든 속마음을 들켜도 좋은 기분이야. .. 2023. 3. 27.
내 옆 그때 기억나? 아마 4월 말쯤이었을 거야. 밤이었고, 날씨는 적당히 선선했어. 조금은 추웠던 것 같기도 해. 날은 저물었고, 버스 막차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헤어지기 싫었던 우리는 교회 앞 계단에서 한참을 떠들었어. 그 교회 앞에는 사람이 잘 지나가지 않는 골목이 있었고, 적당히 우리를 가려주는 나무가 있었어. 사실 나는 알고 있었어.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마지막 버스가 지나가 버렸다는 걸. 하지만 난 그걸 한참 뒤에 너에게 얘기했고,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첫차가 오기 전까지 그 계단에서 새벽을 꼬박 새워야 했어. 그날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그냥 그날 밤공기가 유독 상쾌했고, 계단에 누워서 본 나무는 왠지 투명해 보였고, 한두 명씩 지나다니던 골목에는 마침내 아무도 다니지 .. 2023. 3. 20.